7월 13일 아리랑TV에서 박준우 사무처장에게 개헌에 관해 인터뷰 요청이 왔습니다. 뉴스에는 짧은 멘트만 소개되었습니다만,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작성한 답변지를 함께 공유합니다. 시민행동의 공식 입장은 아니고 개인 의견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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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민들의 생활에 있어 개헌은 왜 필요한가?
● 국민들의 생활을 직접 개선하기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국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싶은데 헌법 때문에 못하고 있는 경우는 사실 거의 없다. 헌법의 기본권 조항이나 경제 조항에서 무언가를 명시적으로 못하게 하는 조항은 드물다.
● 물론 반드시 고쳐야 하는 조항이 하나 있기는 하다. 바로 29조 2항, 공무원 군인의 국가배상청구권 제한 조항이다. 구체적으로는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 기타 법률이 정하는 자가 전투·훈련 등 직무집행과 관련하여 받은 손해에 대하여는 법률이 정하는 보상 외에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한 배상은 청구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이건 유신 헌법 때 만든 조항인데 탄생 배경부터가 문제가 많다. 베트남 전에서 상관의 부당한 지시로 인해 전투 중 죽거나 다친 군인들 때문에 손해배상 청구가 폭증하니까 이걸 못하게 하려고 국가배상법 2조에 이 조항을 넣었다. 그런데 대법원이 이걸 위헌 판결을 하니까 유신헌법을 만들면서 아예 헌법에 집어넣어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방산비리 때문에 낙하산 불량품이 잔뜩 들어왔다고 하자. 강하 훈련 때 그 낙하산이 안 펴져서 죽었다고 해도 국가에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거다. 물론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면 국가가 그 병사를 현충원에 보내고 특진에 엄청난 보상금을 지급하는 등 소란을 떨 것이다. 그러나 피해에 대한 배상을 할 수는 없다. 이건 생활을 개선하는 문제를 넘어서서 그 자체로 독소 조항이라서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
● 또 하나 직접적인 이슈가 되는 조항이 있긴 하다. 121조의 경자유전의 원칙이다.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라고 되어 있다. 사실 농촌 출신이지만 현재 도시에 살아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주들이 많은데 이 분들이 실제로는 다들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이 조항이 비현실적이라고 하고 있다. 또, 농업 발전을 위해서 기업들이 농업에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 조항이 기업농을 막는 조항이라고 보고 폐지를 주장한다. 하지만 이걸 폐지하면 전국의 농지가 투기 대상이 되고 농업 자체가 붕괴할 우려가 크다는 점에서 오히려 국민들의 생활을 악화시킬 수도 있어서 쉽게 폐지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 어쨌든 이 두 조항을 제외하면 개헌이 직접적으로 국민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효과는 없을 것이다. 이번에 개헌특위에서 안전권, 소비자 권리, 문화생활 향유권, 동일노동 동일임금 같은 것들을 도입하는 데 합의를 봤다고 하는데 물론 다 중요한 가치들이고 국가의 의지를 표명하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헌법에 그 조항들이 없어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가습기 피해자들이 돌아가시고 비정규직들이 차별받고 있는 게 아니다. 그 정신에 따라 만들어져 있는 현행 법들을 안 지켜서 그런 거다. 그거 만든다고 갑자기 더 안전해지거나 갑자기 차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 물론 양심적 병역거부나 동성혼 허용 같은 걸 헌법에 명문화한다면 많은 분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걸 법률로 만드는 걸 금지하는 조항이 헌법에 없다. 과반이면 되는 입법보다 2/3가 넘어야 하는 개헌이 더 어렵다. 개헌이 가능할 거면 이미 입법이 되었을 것이다.
● 그럼 개헌은 국민들의 생활의 개선과는 무관한 문제인가? 그렇지는 않다. 헌법은 원래 국가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법이다. 국가가 국민들의 뜻을 잘 반영해서 민주적이고 효과적으로 작동하게 만들면 그 결과로 국민의 생활이 개선되는 것이다.
● 지난 역사를 보면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일방적으로 의사결정하고, 국회는 국회대로 정쟁만 거듭하다보니 국민 생활에 중요한 법률들은 늘 정치의 중심에 밀려나서 통과되지 않거나 연말에 수십 개 법안이 날치기로 졸속 통과되곤 한다. 당장 지금만 해도 새 정부가 출범한 지 한참이 지나도록 법안 하나 통과 못 시킨 건 물론이거니와 조각도 다 못했다. 지난 12월 이후 거의 8개월 째 정부가 제 기능을 온전히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게 다 헌법 때문은 아니다. 정치권이 국민들에게 책임감을 갖고 일했다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구조 때문에 발생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일단 뽑히기만 하면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4년, 5년 후에 선거가 다가올 때까지 국민들 눈치를 안 본다. 협치를 강제할 방법도 별로 없다. 이런 걸 고치기 위한 방안을 찾아보려는 시도이다. 어떤 게 정답인지는 모르지만 내각제나 대통령 중임제 같은 게 그렇고, 국민소환제 같은 것도 그런 고민에서 나오는 것이다.
● 그렇다고 반드시 권력구조 전체를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사원의 독립성 강화, 혹은 회계감사 기능의 국회 이관 같은 미시적인 조정도 중요할 수 있다. 예산 법률주의 같은 것도 그런 일환이다. 우리는 행정부가 예산을 짜면 국회가 승인하는 건데, 예산 법률주의는 국회에서 예산을 확정하면 법적 효력이 생기고 행정부는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이 부분도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 검찰이 민생을 돌보기는커녕 권력을 비호하는 데 앞장서니까 수사권을 경찰에 주자는 얘기가 나오고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따로 둬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런 것도 개혁의 범위에 따라서는 개헌이 필요할 수도 있다. 또는 만 40세 이상만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게 하는 조항을 바꾸는 개헌이 필요할 수도 있다. 여러 나라에서 30대 지도자들이 국가 수반이 되어 미래지향적인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원천봉쇄해놓고 있다.
● 다양한 국가기구들이 각자 국민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해 움직이게 하는 구조를 찾아낸다면, 개헌이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게 될 것이다. 반면 행정부든 국회든 사법부든 다들 자기 기관의 권한만 강화하려 들고 그 결과 나눠먹기 식으로 끝나게 되면 국민의 생활 개선과는 오히려 멀어질 것이다. 앞서 예산 법률주의 얘기했는데 이게 행정부의 자의적 예산 운용을 막고 정부를 투명하게 하는 데 보탬이 되긴 하는데 반대로 의회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문제를 낳기도 한다.미국 같은 경우 오바마케어처럼 여야간의 쟁점이 되는 정책 한 두 개로 인해 연방정부가 폐쇄되는 셧다운이 곧잘 발생한다. 그러면 피해는 국민만 본다. 그래서 제대로 된 개헌을 하려면 전 국민이 오랫동안 지혜를 모아 논의해야 한다. 정치권에만 맡겨둘 일이 아니다.
2. 개헌의 중요 과제 몇가지가 있는데 (정부 형태, 기본권, 지방분권, 선거제도 등) 가장 중요한 과제는?
●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나 국민의 뜻을 가장 잘 반영하게 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게 개헌의 근본적인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작 헌법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국민의 뜻에 비례하여 국회나 지방의회가 구성되도록 선거제도를 바꾸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학자들도 선거법이나 정당법, 정치자금법 같은 중요한 정치관계법들은 사실상 헌법과 같은 중대성을 갖고 있다고 해서 광의의 헌법이라고 부른다.
● 그리고 또 하나는 지방분권이다. 실제로 국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새롭고 창의적인 제도들은 지방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헌법상 지방 정부의 자율성은 매우 제한적이다. 국가의 법률의 범위 안에서만 입법이 가능하고 자체적으로 세금을 도입할 권리도 없다.
● 예를 하나 들어보면 1990년대에 부천에서 담배자판기 금지 조례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조례와 관련된 상위법이 없어서 무효화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이 조례가 여론의 지지를 얻으면서 국회에서 아예 담배자판기 판매를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어주는 덕분에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지금도 서울시에는 공원이나 어린이 놀이터에서 음주를 금지하는 조례가 올라가 있는데 이것도 상위법에 근거가 없어서 처리를 못하고 있다.
● 이런 작은 변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잘 알다시피 성남시의 청년배당이나 서울시의 청년수당도 보건복지부가 각종 상위법령에 위반된다고 해서 반대하는 바람에 도입이 지연되거나 아직도 소송 중에 있다.
● 물론 지방정부가 반드시 중앙정부보다 더 잘한다는 보장은 없다. 다만 우리 사회가 지금 겪고 있는 각종 문제들, 그러니까 일자리 감소, 청년 실업, 저출산 고령화 같은 각종 사회문제들은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들이다. 선진국들도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 문제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일방적으로 하나의 방향을 정해서 밀어붙이기보다는 지방 차원에서 다양하게 실험을 해보고 효과가 있는 것들을 좀 더 큰 광역 자치단체 차원에서, 그리고 더 큰 국가 차원에서 확대 시행해보는 것이 더 바람직한 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방에 더 많은 권한을 주는 개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구체적으로는 “지방자치단체는 주민의 복리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고 재산을 관리하며, 법령의 범위 안에서 자치에 관한 규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한 헌법 제117조 1항의 ‘법령의 범위 안에서’라는 표현을 “법령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같은 표현으로 바꾸어야 한다. 아울러 재정 자율성도 확대해야 한다.
3. 합의가 상대적으로 쉬운 과제와 어려운 과제가 있다면?
● 당연히 추상적인 과제나 이미 사회적 합의가 있는 과제는 합의가 쉬울 테고 구체적인 과제이면서도 사회적 논란이 있는 과제는 합의가 어려울 것이다.
● 그런 면에서 기본권 관련 의제들이 상대적으로 합의가 쉬울 테고 권력구조 관련 의제들은 이해관계가 엇갈릴 테니 합의가 어려울 것이다.
● 합의가 쉽고 어려운 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추상적인 기본권을 합의해놓고 정작 실질적인 권력구조에 관해서는 정치인들에게 유리한 것만 고르거나 서로 주고받기 해서 합의한 개헌안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헌을 국회에, 정치인들에게만 맡겨두는 것은 안 될 일이다. 국민들이 직접 논의에 참여해서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야 할 것이다. 국민들의 실질적인 참여를 보장하지 않는 개헌이라면 안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4. 국민 참여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 사실 개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개헌에 관한 구체적 절차를 규정한 법률이 없다는 것이다. 개헌과 관련해서는 대통령과 국회만이 개헌을 발의할 수 있다, 국회에서 2/3 이상으로 통과해야 한다,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는 세 가지 사항을 헌법에 규정한 것 외에 아무런 구체적인 절차가 정해져 있지 않다.
● 일반적인 입법에 관해서는 국민이 국회의원들에게 권한을 위임했지만 헌법은 국회의원들이 그 제·개정 권한을 위임받은 법이 아니다. 헌법은 국민과 국가 사이의 기본 계약이다. 그래서 의미있는 헌법은 광복이나 4·19, 87년 6월 항쟁 동안 표출되었던 국민들의 뜻이 담겨서 만들어졌었다. 이번 개헌이 그 정도의 무게를 갖기 위해서는 개헌 과정이 국민들의 광범위한 참여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 앞서도 말했지만 헌법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행정부 뿐만 아니라 판사나 국회의원, 지방의회 의원까지 포함해서, 공직자들을 어떻게 뽑고 어떻게 일하게 할 지를 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자기들이 정하게 내버려두면 자기들 유리한 대로 하지 않을까?
● 그래서 정치관계법도 대개 정치개혁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시민 대표들이 결정하면 국회에서는 이걸 승인할지 거부할지만 결정하는 방식으로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개헌 시에는 사회 전체의 의견을 최대한 광범위하게 수렴하는 과정을 규정한 개헌절차법이 필요하다.
● 그런데 개헌절차법을 만들 때 기존 정치개혁특별위원회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정개특위는 대개 유명 단체 대표들이나 학자들 같은 오피니언 리더들로, 그것도 대개 20명 이내의 소수로 구성되는데 이들의 생각이 기존 여야의 생각과 비슷하다보니 사실 여기서도 사회적 토론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기존 여야 대립이 그대로 재현되곤 했다.
● 지금 개헌특위도 나름대로 여론을 수렴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요 경제단체나 노동단체, 시민단체 등등 소위 말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것도 실질적인 논의가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의견을 청취하는 형태에 가깝다. 앞으로 일반 국민 수천 명이 참여하는 원탁토론 같은 것도 한다고 하지만 그런 방식은 1회성의 보여주기식 행사 이상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 무작위로 선발된 일반 국민들이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쟁점을 놓고 지속적으로 논의하면서 당리당략의 산물이 아니라 징정한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숙의민주주의적 방식이 필요하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국회에도 이런 내용을 담은 법안이 제출되어 있고 추첨민회네트워크 같은 단체들도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
7월 13일 아리랑TV에서 박준우 사무처장에게 개헌에 관해 인터뷰 요청이 왔습니다. 뉴스에는 짧은 멘트만 소개되었습니다만,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작성한 답변지를 함께 공유합니다. 시민행동의 공식 입장은 아니고 개인 의견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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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민들의 생활에 있어 개헌은 왜 필요한가?
● 국민들의 생활을 직접 개선하기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국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싶은데 헌법 때문에 못하고 있는 경우는 사실 거의 없다. 헌법의 기본권 조항이나 경제 조항에서 무언가를 명시적으로 못하게 하는 조항은 드물다.
● 물론 반드시 고쳐야 하는 조항이 하나 있기는 하다. 바로 29조 2항, 공무원 군인의 국가배상청구권 제한 조항이다. 구체적으로는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 기타 법률이 정하는 자가 전투·훈련 등 직무집행과 관련하여 받은 손해에 대하여는 법률이 정하는 보상 외에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한 배상은 청구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이건 유신 헌법 때 만든 조항인데 탄생 배경부터가 문제가 많다. 베트남 전에서 상관의 부당한 지시로 인해 전투 중 죽거나 다친 군인들 때문에 손해배상 청구가 폭증하니까 이걸 못하게 하려고 국가배상법 2조에 이 조항을 넣었다. 그런데 대법원이 이걸 위헌 판결을 하니까 유신헌법을 만들면서 아예 헌법에 집어넣어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방산비리 때문에 낙하산 불량품이 잔뜩 들어왔다고 하자. 강하 훈련 때 그 낙하산이 안 펴져서 죽었다고 해도 국가에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거다. 물론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면 국가가 그 병사를 현충원에 보내고 특진에 엄청난 보상금을 지급하는 등 소란을 떨 것이다. 그러나 피해에 대한 배상을 할 수는 없다. 이건 생활을 개선하는 문제를 넘어서서 그 자체로 독소 조항이라서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
● 또 하나 직접적인 이슈가 되는 조항이 있긴 하다. 121조의 경자유전의 원칙이다.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라고 되어 있다. 사실 농촌 출신이지만 현재 도시에 살아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주들이 많은데 이 분들이 실제로는 다들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이 조항이 비현실적이라고 하고 있다. 또, 농업 발전을 위해서 기업들이 농업에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 조항이 기업농을 막는 조항이라고 보고 폐지를 주장한다. 하지만 이걸 폐지하면 전국의 농지가 투기 대상이 되고 농업 자체가 붕괴할 우려가 크다는 점에서 오히려 국민들의 생활을 악화시킬 수도 있어서 쉽게 폐지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 어쨌든 이 두 조항을 제외하면 개헌이 직접적으로 국민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효과는 없을 것이다. 이번에 개헌특위에서 안전권, 소비자 권리, 문화생활 향유권, 동일노동 동일임금 같은 것들을 도입하는 데 합의를 봤다고 하는데 물론 다 중요한 가치들이고 국가의 의지를 표명하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헌법에 그 조항들이 없어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가습기 피해자들이 돌아가시고 비정규직들이 차별받고 있는 게 아니다. 그 정신에 따라 만들어져 있는 현행 법들을 안 지켜서 그런 거다. 그거 만든다고 갑자기 더 안전해지거나 갑자기 차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 물론 양심적 병역거부나 동성혼 허용 같은 걸 헌법에 명문화한다면 많은 분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걸 법률로 만드는 걸 금지하는 조항이 헌법에 없다. 과반이면 되는 입법보다 2/3가 넘어야 하는 개헌이 더 어렵다. 개헌이 가능할 거면 이미 입법이 되었을 것이다.
● 그럼 개헌은 국민들의 생활의 개선과는 무관한 문제인가? 그렇지는 않다. 헌법은 원래 국가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법이다. 국가가 국민들의 뜻을 잘 반영해서 민주적이고 효과적으로 작동하게 만들면 그 결과로 국민의 생활이 개선되는 것이다.
● 지난 역사를 보면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일방적으로 의사결정하고, 국회는 국회대로 정쟁만 거듭하다보니 국민 생활에 중요한 법률들은 늘 정치의 중심에 밀려나서 통과되지 않거나 연말에 수십 개 법안이 날치기로 졸속 통과되곤 한다. 당장 지금만 해도 새 정부가 출범한 지 한참이 지나도록 법안 하나 통과 못 시킨 건 물론이거니와 조각도 다 못했다. 지난 12월 이후 거의 8개월 째 정부가 제 기능을 온전히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게 다 헌법 때문은 아니다. 정치권이 국민들에게 책임감을 갖고 일했다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구조 때문에 발생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일단 뽑히기만 하면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4년, 5년 후에 선거가 다가올 때까지 국민들 눈치를 안 본다. 협치를 강제할 방법도 별로 없다. 이런 걸 고치기 위한 방안을 찾아보려는 시도이다. 어떤 게 정답인지는 모르지만 내각제나 대통령 중임제 같은 게 그렇고, 국민소환제 같은 것도 그런 고민에서 나오는 것이다.
● 그렇다고 반드시 권력구조 전체를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사원의 독립성 강화, 혹은 회계감사 기능의 국회 이관 같은 미시적인 조정도 중요할 수 있다. 예산 법률주의 같은 것도 그런 일환이다. 우리는 행정부가 예산을 짜면 국회가 승인하는 건데, 예산 법률주의는 국회에서 예산을 확정하면 법적 효력이 생기고 행정부는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이 부분도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 검찰이 민생을 돌보기는커녕 권력을 비호하는 데 앞장서니까 수사권을 경찰에 주자는 얘기가 나오고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따로 둬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런 것도 개혁의 범위에 따라서는 개헌이 필요할 수도 있다. 또는 만 40세 이상만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게 하는 조항을 바꾸는 개헌이 필요할 수도 있다. 여러 나라에서 30대 지도자들이 국가 수반이 되어 미래지향적인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원천봉쇄해놓고 있다.
● 다양한 국가기구들이 각자 국민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해 움직이게 하는 구조를 찾아낸다면, 개헌이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게 될 것이다. 반면 행정부든 국회든 사법부든 다들 자기 기관의 권한만 강화하려 들고 그 결과 나눠먹기 식으로 끝나게 되면 국민의 생활 개선과는 오히려 멀어질 것이다. 앞서 예산 법률주의 얘기했는데 이게 행정부의 자의적 예산 운용을 막고 정부를 투명하게 하는 데 보탬이 되긴 하는데 반대로 의회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문제를 낳기도 한다.미국 같은 경우 오바마케어처럼 여야간의 쟁점이 되는 정책 한 두 개로 인해 연방정부가 폐쇄되는 셧다운이 곧잘 발생한다. 그러면 피해는 국민만 본다. 그래서 제대로 된 개헌을 하려면 전 국민이 오랫동안 지혜를 모아 논의해야 한다. 정치권에만 맡겨둘 일이 아니다.
2. 개헌의 중요 과제 몇가지가 있는데 (정부 형태, 기본권, 지방분권, 선거제도 등) 가장 중요한 과제는?
●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나 국민의 뜻을 가장 잘 반영하게 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게 개헌의 근본적인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작 헌법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국민의 뜻에 비례하여 국회나 지방의회가 구성되도록 선거제도를 바꾸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학자들도 선거법이나 정당법, 정치자금법 같은 중요한 정치관계법들은 사실상 헌법과 같은 중대성을 갖고 있다고 해서 광의의 헌법이라고 부른다.
● 그리고 또 하나는 지방분권이다. 실제로 국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새롭고 창의적인 제도들은 지방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헌법상 지방 정부의 자율성은 매우 제한적이다. 국가의 법률의 범위 안에서만 입법이 가능하고 자체적으로 세금을 도입할 권리도 없다.
● 예를 하나 들어보면 1990년대에 부천에서 담배자판기 금지 조례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조례와 관련된 상위법이 없어서 무효화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이 조례가 여론의 지지를 얻으면서 국회에서 아예 담배자판기 판매를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어주는 덕분에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지금도 서울시에는 공원이나 어린이 놀이터에서 음주를 금지하는 조례가 올라가 있는데 이것도 상위법에 근거가 없어서 처리를 못하고 있다.
● 이런 작은 변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잘 알다시피 성남시의 청년배당이나 서울시의 청년수당도 보건복지부가 각종 상위법령에 위반된다고 해서 반대하는 바람에 도입이 지연되거나 아직도 소송 중에 있다.
● 물론 지방정부가 반드시 중앙정부보다 더 잘한다는 보장은 없다. 다만 우리 사회가 지금 겪고 있는 각종 문제들, 그러니까 일자리 감소, 청년 실업, 저출산 고령화 같은 각종 사회문제들은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들이다. 선진국들도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 문제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일방적으로 하나의 방향을 정해서 밀어붙이기보다는 지방 차원에서 다양하게 실험을 해보고 효과가 있는 것들을 좀 더 큰 광역 자치단체 차원에서, 그리고 더 큰 국가 차원에서 확대 시행해보는 것이 더 바람직한 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방에 더 많은 권한을 주는 개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구체적으로는 “지방자치단체는 주민의 복리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고 재산을 관리하며, 법령의 범위 안에서 자치에 관한 규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한 헌법 제117조 1항의 ‘법령의 범위 안에서’라는 표현을 “법령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같은 표현으로 바꾸어야 한다. 아울러 재정 자율성도 확대해야 한다.
3. 합의가 상대적으로 쉬운 과제와 어려운 과제가 있다면?
● 당연히 추상적인 과제나 이미 사회적 합의가 있는 과제는 합의가 쉬울 테고 구체적인 과제이면서도 사회적 논란이 있는 과제는 합의가 어려울 것이다.
● 그런 면에서 기본권 관련 의제들이 상대적으로 합의가 쉬울 테고 권력구조 관련 의제들은 이해관계가 엇갈릴 테니 합의가 어려울 것이다.
● 합의가 쉽고 어려운 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추상적인 기본권을 합의해놓고 정작 실질적인 권력구조에 관해서는 정치인들에게 유리한 것만 고르거나 서로 주고받기 해서 합의한 개헌안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헌을 국회에, 정치인들에게만 맡겨두는 것은 안 될 일이다. 국민들이 직접 논의에 참여해서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야 할 것이다. 국민들의 실질적인 참여를 보장하지 않는 개헌이라면 안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4. 국민 참여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 사실 개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개헌에 관한 구체적 절차를 규정한 법률이 없다는 것이다. 개헌과 관련해서는 대통령과 국회만이 개헌을 발의할 수 있다, 국회에서 2/3 이상으로 통과해야 한다,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는 세 가지 사항을 헌법에 규정한 것 외에 아무런 구체적인 절차가 정해져 있지 않다.
● 일반적인 입법에 관해서는 국민이 국회의원들에게 권한을 위임했지만 헌법은 국회의원들이 그 제·개정 권한을 위임받은 법이 아니다. 헌법은 국민과 국가 사이의 기본 계약이다. 그래서 의미있는 헌법은 광복이나 4·19, 87년 6월 항쟁 동안 표출되었던 국민들의 뜻이 담겨서 만들어졌었다. 이번 개헌이 그 정도의 무게를 갖기 위해서는 개헌 과정이 국민들의 광범위한 참여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 앞서도 말했지만 헌법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행정부 뿐만 아니라 판사나 국회의원, 지방의회 의원까지 포함해서, 공직자들을 어떻게 뽑고 어떻게 일하게 할 지를 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자기들이 정하게 내버려두면 자기들 유리한 대로 하지 않을까?
● 그래서 정치관계법도 대개 정치개혁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시민 대표들이 결정하면 국회에서는 이걸 승인할지 거부할지만 결정하는 방식으로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개헌 시에는 사회 전체의 의견을 최대한 광범위하게 수렴하는 과정을 규정한 개헌절차법이 필요하다.
● 그런데 개헌절차법을 만들 때 기존 정치개혁특별위원회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정개특위는 대개 유명 단체 대표들이나 학자들 같은 오피니언 리더들로, 그것도 대개 20명 이내의 소수로 구성되는데 이들의 생각이 기존 여야의 생각과 비슷하다보니 사실 여기서도 사회적 토론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기존 여야 대립이 그대로 재현되곤 했다.
● 지금 개헌특위도 나름대로 여론을 수렴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요 경제단체나 노동단체, 시민단체 등등 소위 말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것도 실질적인 논의가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의견을 청취하는 형태에 가깝다. 앞으로 일반 국민 수천 명이 참여하는 원탁토론 같은 것도 한다고 하지만 그런 방식은 1회성의 보여주기식 행사 이상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 무작위로 선발된 일반 국민들이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쟁점을 놓고 지속적으로 논의하면서 당리당략의 산물이 아니라 징정한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숙의민주주의적 방식이 필요하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국회에도 이런 내용을 담은 법안이 제출되어 있고 추첨민회네트워크 같은 단체들도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